따로 함께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고 동료가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관계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가벼움은 서로의 짐을 나눠 지지 않으려는 개인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사람과 친밀하기를 원하지만 다른이의 삶을 책임지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친밀감의 바램과 책임감의 부담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에 타인을 너무 멀리할 수 도 너무 가까이 할 수도 없는 관계의 딜레마가 생깁니다. 그런 이중적 욕망을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 비유"로 묘사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서로의 가시에 찔려 뒤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서로에게 또 다가가고 아파서 물러납니다. 그렇게 다가가고 물러나는 것을 여러차례 반복하면서 고슴도치들은 어느정도 추위도 피하고 가시도 피할 수 있는 그들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발견합니다.
사람들도 고슴도치처럼 다른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不可近 不可遠' 너무 가까이 하지도 너무 멀리 하지도 않는 것을 현명한 관계방식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허전합니다.
고슴도치 비유가 들어있는 쇼펜하우어의 책이 출간된 때는 1851년입니다. 그로부터 166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의 비유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함께이면서도 따로 존재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오늘의 인터넷 SNS 문화에서 더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SNS문화의 심리를 분석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심리학자 셰리 터클이 쓴 Alone Together(따로 함께)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무슨 내용일지 금방 추측하시겠지요? 책의 부제는 더 명시적입니다. Why We Expect More from Technology and Less Each Other 왜 우리는 서로에게서보다 기술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가?
터클의 핵심주장 중 하나는 정보기술 시대의 삶은 접속(connection)만 있을 뿐 관계(relationship)는 없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들은 최소한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함께 있었지만, SNS의 고슴도치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서로가 보여주는 모습만 보며 접속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접속이 매우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페이스북을 예로 들면, 사람들은 너무 쉽게 '친구'가 되고 너무 쉽게 '친구'이기를 그만 둡니다. 타인이 좋을 때는 [친구 추가]와 [좋아요]를 가볍게 클릭하고 타인이 싫어지면 [친구 끊기]를 아주 가볍게 클릭합니다. 그것은 책임 있는 관계가 아니라 가벼운 접속과 단절입니다.
우리는 왜 관계하지 않고 접속만 하게 되었을까요? 터클은 "인간관계는 풍부하고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외로운 것이 싫어 접속하지만 부담은 지기 싫어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인간관계에는 책임과 수고가 따르니까요. 그런데 오늘의 SNS 기술은 그런 책임과 수고 없이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해 줍니다. 터클은 "디지털 접속은 우정의 부담 없이 교제의 환상을 갖게 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접속(connection)은 활발하지만 대화(conversation)와 소통(communication)은 없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대화와 소통 능력이 현저히 약해진 것은 쉽게 접속하고 쉽게 단절하는 SNS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인터넷이나 SNS가 없다면 우리는 차이와 갈등을 경험할 때마다 최소한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들처럼 서로를 찌르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면서 적당한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묘. 함께 한 물리적 공간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이버 공간인 SNS에서는 어쩌다 맘에 안 드는 생각을 접하게 되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하며 바로 접속을 끊어 버립니다. 대화와 소통의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터클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우리를 형성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온라인 세계에서의 쉬운 접속과 단절의 기술은 오프라인 세계에서의 우리의 관계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의 우리는 타인과 갈등하게 되면, 지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함께 변화하고 성숙하기보다는, 접속을 귾듯이 갈등을 피해버립니다. 갈등을 전환하거나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터클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 중 하나가 '고독'(solitude)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의 사람들이 외로움(loneliness) 때문에 늘 접속해 있느라 고독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SNS에서는 생각의 깊이보다 빠르기가 더 중시됩니다. 어떤 사태에 대한 깊은 성찰(reflection)보다는 빠른 반응(reaction)이 더 지배적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소모적인 '키패틀'에 휩쓸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집단적 분노조절 장애, 냉소와 혐오도 성찰의 부재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결국 세계 최고 수준으로 진보한 한국의 인터넷 문화와 환경이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퇴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볍고 차가운 접속에 지친 사람들은 책임 있고 따뜻한 관계를 회복해보면 어떨까요?
좀 불편하겠지만~